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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백석 - 선우사 – 함주시초 정리 및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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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사 – 함주시초 – 백석

⤷반찬 친구에 대한 글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① 나주에서 생산된 전통 소반 ② 같은 말 나좃쟁반 : 갈대를 한 자쯤 잘라 묶어 기름을 붓고 붉은 종이로 둘러싸서 초처럼 불을 켜는 나조대를 밑에서 받치는 쟁반 - ①의 뜻인듯
쓸쓸한 저녁을 먹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혜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맑고 깨긋한, ⤷넓은 모래벌판 ⤷하루의 긴 시간


바람 좋은 한 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들은 탓이다.
⤷비오리 오리과에 속하는 물새 ⤷[북한어] 사람이나 생물에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이슬.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솔개소리. 솔개는 무서운 매의 일종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
착하디 착해서 세괏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매우 기세가 당당하고 또는 억세고 날카로운.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 백석

▣ 주제 : 고독을 뛰어넘는 정결한 의지

▣ 구성

├ 1연 : 쓸쓸한 저녁을 맞이하는 흰밥과 가재미와 나

├ 2연 : 서로 미덥고 정답고 좋은 우리

├ 3,4연 : 욕심이 없고 착하고 정갈한 우리

└ 5,6연 : 서럽지도 외롭지도 않고 누구도 부럽지 않은 우리

▣ 출전 : 백석시전집(이동순 편저, 1987, 창작과 비평사)

 

감상의 길잡이

'친구에게 드리는 글' 이라는 제목의 <선우사( 膳友辭 )>는 오히려 백석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역경을 쓸쓸하고 담담하게 극복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백석은 자연을 벗하여 살아감을 노래하고 있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백석 자신은 맑은 물 밑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가재미와 그리고 바람 좋은 한 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가 들은 벼이삭을 방앗간에서 정제하여 밥을 한 흰밥과 같이 이야기하며 지낸다. 그리하여 모두 욕심이 없이 희어졌다고 하며 너무나 정갈해서 오히려 파리하다고 백석은 고백하고 있다.

 

이 시의 제목인 선우사의 뜻은 ‘반찬 친구에 대한 글’이다. 선(膳:반찬 선)자가 선물을 드린다는 뜻도 있지만 반찬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반찬 친구인 나와 가재미와 흰밥에 대한 글’이라는 뜻으로, 제목 선우사를 풀이할 수 있다. 나조반(밥상의 종류)은 나주에서 생산된 전통 소반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흰밥’과 ‘가재미’와 ‘내’가 나와 앉아서 만나는 순간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생각지고 않았던 바다와 벌판과 산골의 새롭고 완벽한 결합을 꿈꿀 수 있음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의 발상법도 특이하다. 시인은 자기가 먹을 반찬으로 놓인 음식물을 향해 동류의식을 느낀다. 이 시 속의 시인과 흰밥과 가재미는 수직적인 지배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친구 관계라는 독특한 발상법을 보여 준다. 물론 함주(함경북도 함주군)라는 객지에 홀로 있으면서 혼자 저녁밥 먹기가 쓸쓸해서 밥상에 놓인 가재미와 흰밥을 보고 말을 걸기 시작하는 데에서 이런 시가 나타났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도 시인이 어려서부터 타고 났다고 여겨지는 모근 생물에 대한 생명 존중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인간 본위의 일방적인 세계관이 아니라 다른 생물에 대한 외경 의식을 갖고 쌍방향적 세계관으로 대하는 것이다. 이런 세계관은 원래 시인들이 갖는, 이질적인 데에서 동질적인 것을 찾아낼 줄 아는 은유적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어떻게 사람과 가재미와 흰밥이 닮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이 시를 읽어 보면 이 세 존재는 각각 바다, 벌판, 산에서 아름답게 생장하여 각각 우주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재미는 ‘맑은 물 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었고’. 흰 쌀밥이 된 벼는 ‘바람 좋은 한 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 들었고’, 시인은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났다. 그들은 각각 자기 나름대로 맑고 좋은 환경에서 행복하게 자라나서 모두 욕심이 없고, 착하고, 정갈해서 가난해도 정답고 좋다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가재미
쌓(흰 밥)
나(사람)
하얗다
하얗다
피부가 하얗다
세괏은(성질이나 기세가 억센) 가시 하나 없다
억세지 않다
착하디 착하다
정갈하다
정갈하다
정갈해서 파리하다
  •  

하얗고 억세지 않고 정갈한 공통점을 가진 이들은 각각 바다와 들판과 산골의 아름다운 대상을 대표하며 ‘완벽한 우주적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에 가난해도 서럽지 않고 외롭지도 않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가재미와 벼와 나를 가리키는 이 ‘우리들’은 세상을 반목과 질시가 아닌 하나의 원융(모든 법의 이치가 골고루 융통하여 막힘이 없음.)한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중요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 바탕에 동질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은유적 세계관이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이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온다. 이 말은 세상을 버린다는 외톨이 의식이라기보다 외로운 세 존재가 쓸쓸한 어느 저녁나절 어느 한 순간에 완벽한 한 쌍을 이룰 때 이들은 그 자체로 우주의 한 축이자 이 세상의 대표적 존재가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즉, 더 이상 다른 존재를 논할 필요가 없이 이 순간 세 층을 이루는 ‘우리들’ 셋은 완벽한 세상의 대표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면, 인간들이 얽혀서 싸우고 경쟁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세상만 세상이 아니라, 어느 날 저녁 쓸쓸한 나조반 위에서 우연히 함께 만난 다른 생명체들과의 세상도 아름답고 독특한 시적 세계를 이룩할 수 있다는 다원주의적 세계관이 뒷받침된 미학을 엿볼 수 있다.

- 국립국어원 홈피/쉼표, 마침표. 19호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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