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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소설

수능특강 -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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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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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 석 제

 

황만근이 없어졌다. 새벽에 혼자 경운기를 타고 집을 나간 황만근은 늘 들일을 나가면 돌아오는 시각인 저물녘에 돌아오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취하더라도 열두시가 될락말락한 한밤이면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평생 단 하루 외박한 뒤 돌아왔던 그 시각, 횃대의 닭이 울음을 그치는 아침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마을회관 앞, 황만근이 직접 심어놓은 등나무 덩굴 아래, 직접 짠 평상에 사람들이 모였다. 먼저 이장이 입을 열었다.

 

"만그인지 반그인지 그 바보 자석 하나 따문에 소 여물도 못하러 가고 이기 뭐라. 스무 바리나 되는 소가 한꺼분에 밥 굶는 기 중요한가, 바보 자석 하나가 어데 가서 술 처먹고 집에 안 오는 기 중요한가, 써그랄."

 

마을에서 연장자 축에 들고 가장 학식이 높아 해마다 한번씩 지내는 용왕제(龍王祭)에 축()을 초()하는 황재석씨가 받았다.

 

"그래도 질래 있던 사람이 없어지마 필시 연유가 있는 기라. 사람이 바늘이라, 모래라, 기양 없어지는 기 어디 있어. 암만 그래도 우리 동네 사람 아이라. 반그이. 아이다, 만그이가 여게서 나서 사는 동안 한분도 밖에서 안 들어온 적이 없는데 말이라."

 

"아이지요. 어르신. 가가 군대간다 캤을 때 여운지 토깨인지하고 밤새도록 싸우니라고 하루는 안 들어왔심다."

 

용왕제에서 집사 역을 하는 황동수가 우스개처럼 말을 이었다. 아침밥을 먹기도 전 황만근의 아들이 찾아와 황만근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길래 얼결에 동네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역할을 하게 된 민씨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생각하고 참견을 했다.

 

"어제 궐기대회 한다 하고 간 사람이 누구누구십니까. 황만근씨하고 같이 간 사람은요? 궐기대회 하는 동안 본 사람은 없나요?"

 

자리에 모인 대여섯 명의 황씨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더니 모두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이라고 및밍이나 되나. 군 전체 사람이 모도 모있다는 기 백밍이 될라나 말라나 한데 반그이는 돼지고기 반근만해서 그런지 안 보이더라칸께."

 

이장은 계속 빈정거리듯 말을 이었다. 민씨는 이장이 궐기대회 전날 황만근을 따로 불러 무슨 말을 건네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제 밤에 내일 궐기대회 한다고 사람들 모였을 때 이장님이 황만근씨에게 뭐라고 하셨죠. 모임 끝난 뒤에."

 

이장은 민씨를 흘기듯 노려보았다.

 

", 농민보고 농민궐기대회 꼭 나오라 캤는데, 뭐가 잘못됐나?"

 

민씨는 자신도 모르게 따지는 어조가 되었다.

 

"군 전체가 모두 모여도 몇 명 안되었다면서요. 그런 자리에 황만근씨가 꼭 가야 합니까. 아니, 황만근씨만 가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따로 황만근씨한테 부탁을 할 정도로."

 

"이 사람이 뭐라 카는 기라. 이장이 동민한테 농가부채 탕감촉구 전국농민 총궐기대회가 있다, 꼭 참석해서 우리의 입장을 밝히자 카는데 뭐가 잘못됐다 말이라."

 

"잘못이라는 게 아니고요, 다른 사람들은 다 돌아왔는데 왜 황만근씨만 못 오고 있나 하는 겁니다."

 

"내가 아나. 읍에 가보이 장날이더라고. 보나마나 어데서 술 처먹고 주질러 앉았을 끼라. 백릿길을 깅운기를 끌고 갔으이 시간도 마이 걸릴 끼고."

 

다른 사람들은 말이 없었고 민씨와 이장만이 공을 주고받는 꼴이 되어버렸다.

 

"글세, 그 자리에 꼭 황만근씨만 경운기를 끌고 갔어야 했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도 고장난 경운기를."

 

"깅운기를 끌고 오라는 기 내 말이라? 투쟁방침이 그렇다카이. 깅운기도 그렇지, 고장은 무신 고장, 만그이가 그걸 하루이틀 몰았나. 남들이 못 몬다뿌이지."

 

"그럼 이장님은 왜 경운기를 안 타고 가고 트럭을 타고 가셨나요. 이장님부터 솔선수범을 해야지 다른 동민들이 따라할 텐데, 지금 거꾸로 되었잖습니까."

 

"내사 민사무소에서 인원점검 하고 다른 이장들하고 의논도 해야 되고 울미나 바쁜 사람인데 깅운기를 타고 언제 가고 말고 자빠졌나. 다른 동네 이장들도 민소 앞에서 모이가이고 트럭 타고 갔는 거를. 진짜로 깅운기를 끌고 갔으마 군대회에는 늦어도 한참 늦었지. 군청에 갔는데 비가 와가이고 온 사람도 및 없더마. 소리마 및분 지르고 왔지. 군청까지 깅운기를 타고 갈 수나 있던가. 국도에 차들이 미치괘이맨구루 쌩쌩 달리는데 받치만 우얘라고. 다른 동네서는 자가용으로 간 사람도 쌨어."

 

"그러니까 국도를 갈 때는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경운기를 여러 대 끌고 가자는 거였잖습니까. 시위도 하고 의지도 보여준다면서요. 허허. 나 참."

 

"아침부터 바쁜 사람 불러내놓더이, 사람 말을 알아듣도 못하고 엉뚱한 소리만 해싸. 누구맨구로 반동가리가 났나."

 

기어이 민씨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반편은 누가 반편입니까. 이장이니 지도자니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방침을 정했으면 그대로 해야지, 양복 입고 자가용 타고 간 사람은 오고, 방침대로 경운기 타고 간 사람은 오지도 않고, 이게 무슨 경우냐구요."

 

"이 자슥이 뉘 앞에서 눈까리를 똑바로 뜨고 소리를 뻑뻑 질러쌓노. 도시에서 쫄딱 망해가이고 귀농을 했시모 얌전하게 납작 엎드려 있어도 동네 사람 시키줄까 말까 한데, 뭐라꼬? 내가 만그이 이미냐, 애비냐. 나이 오십 다 된 기 어데를 가든동 오든동 지가 알아서 해야지, 목사리 끌고 따라다니까?"

 

마침 황만근의 어머니가 나오지 않았으면 몸싸움이 났을지도 몰랐다. 민씨가 막 핏대를 세우며 맞대꾸를 하려는데, 도저히 시골의 환갑 노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곱고 여린 외모의 여인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서는 평상 앞에서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엉거주춤 서 있는 손자를 붙들고 우는 소리를 냈다.

 

"내가 고딩어를 안 먹는다 캤으마, 이런 일이 없을 낀데, 내가 고딩어를 안 먹는다 캤어도 이런 일이 없을 낀데. 내가 고여히 고딩어를 먹는다 캐가이고 우리 만근이가, 우리 만그이가 고딩어를 사러 갔다가 이래 안 오는구나아."

 

그래서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황만근이 경운기를 끌고 간 날 아침, 아침을 차리던 황만근에게 그의 어머니가 고등어자반이 없으면 밥을 먹지 않겠다고 한 사실을. 이장은 그것 보라는 듯이 "반동가리 반그이가 궐기대회가 아이고 고딩어 사러 갔구마. 효자 났네, 효자 났어" 하고는 허리를 쭉 폈다. 황재석씨도 수염을 쓰다듬으며 "홀어머니 조석을 지극정승으로 핑생 한끼도 안 빠뜨리고 공궤하니, 암만, 효자는 효자지. 천생지효자라" 했다. 그 황만근의 아들인 영호가 덩달아 우는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아이라요. 내가 아침에 집으로 오다가 경운기 타고 가는 아부지를 만났는데요, 목욕을 하고 오라 캤거든요. 목욕탕에 갔을 끼라요. 그런데 면에 있는 목욕탕에 연락해봐도 그런 사람은 안 왔다 카고 …… 온천에 갔는가 봐요. 온천에 가다가 우째 됐는가도 모르고……"

 

사람들은 또한 알게 되었다. 황만근은 전에 없이 전날 밤 그의 아들 방에서 잠을 잤다. 아들은 시험공부하느라고 친구집에서 밤을 새우고 아침에 들어오는 길이었다. 길에서 아버지를 만난 아들은 대번에 아버지가 자신의 방에서 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버지가 자신의 점퍼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장 옷을 벗어 내놓으라, 다시는 내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소리쳤고 덧붙여 제발 좀 목욕탕에 가서 씻고 오라고 했던 것이다. 황만근은 그 길로 목욕탕으로 간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궐기대회가 열리는 읍의 반대편에 있는 온천에 갔든가.

 

"내 평생 반그이가 한번 씻는 걸 못 봤다. 냇가를 가도 샘에를 가도 들어갈 생각을 안하는구마. 목욕탕에 우째 가는 줄도 모를 낀데 온천이 여게서 어데라고 지가 찾아가노."

 

황규수가 입을 비틀며 웃었다. 민씨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할까 말까 하다가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자신도 황만근에게 궐기대회장으로 꼭 가야 한다고 충동질한 사실이 있었다. 술김인지는 몰라도, 당신의 뜻을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한다, 가서 이야기를 하라고 객기를 부렸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황만근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동네 사람 누구든 하루이틀, 또는 한두 달 집을 비울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황만근만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모든 사람이 그의 부재를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누구도 적극적으로 황만근을 찾아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있으나마나한 존재이면서 있었고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이면서 지금처럼 없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했다. 두어 해 전에야 신대 1리로 들어와 황만근의 탄생과 성장, 삶을 처음부터 지켜보지 못한 민씨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을에서 젊은 축에 드는 마흔다섯살의 황영석은 황만근이 벽돌을 찍고 구덩이를 파서 지은 마을회관 변소에서 분뇨를 퍼내면서 황만근의 부재를 알게 되었다.

 

"만그이 자석이 있었으마 내가 돈을 백만원 준다 캐도 이런 일을 안 할 낀데. 아이구, 이 망할놈의 똥냄새, 여리가 싸놔 그런지 독하기도 하네. 이기 곡석한테 독이 될지 약이 될지도 모르겠구마."

 

황만근이 있었으면 군말없이 했을 일이었다. 늘 그렇듯이 벙글벙글 웃으면서.

 

"만그이가 있었으모 저 거름이 우리 밭으로 올 낀데. 만그이가 도대체 어데 갔노."

 

마을회관 곁 조그만 밭에 채소를 심어먹는 여씨 노인도 황만근의 부재를 알게 되었다. 황만근은 마을 공통 분뇨를, 역시 자신이 판 마을 공통의 분뇨장으로 가져가서 충분히 익힌 뒤에, 공평하게 나누어주었다. 황영석처럼 제가 펐다고 바로 제 밭에 가져가다 뿌리지는 않았다. 특히 여씨 노인처럼 일찍 남편을 잃고 혼잣몸이 된 노인들에게는,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 더 자주 거름을 가져다주었다.

 

"만그이한테 물어보자."

 

아이들은 소꿉장난을 하다가 황만근의 부재를 알게 되었다. 공평무사45)한 것이 황만근의 평생의 처사였다. 그에게는 판단능력이 없는 듯 했지만 시비를 물으러 가면, 가노라면 언제나 공평무사한 자연의 이법에 대해 깨우치게 되고 분쟁은 종식되었다.

또는 물어보나마나 명약관화한 일을 두고도 황만근을 들먹였다.

 

"만그이도 알 끼다."

 

또한 동네에 오래도록 내려오는 노래, 구태여 제목을 붙이자면 '황만근가'를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되면서 사람들은 황만근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황만근가, 황만근의 노래, 아니 황만근에 관한 노래는 이렇게 부른다. 먼저 "" 하고 단호하고 크게 소리쳐서 주의를 끈 다음, 한 박자를 쉰 뒤에 "마안-그은" 하고 두 박자로 느릿하게 부른다. 이어서 "백 분(), 찝원(십원), 여끈(열 근), 팔푼, 두 바리(마리)"48) 하고 빠르게 센다. 마지막으로 "그래, 바안-그은" 하고 느긋하게 마친다. 이 노래에는 황만근의 일생이 들어 있고 모든 노래가 그렇다시피 노래를 부르는 마을 사람들의 대체 경험과 정서가 녹아 있다.

황은 성을 말한다. 신대1리는 황씨들이 오십여 호 모여사는 집성촌이다. 2년 전에 귀농한 민씨 같은 타성바지는 황씨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온 노씨를 포함 전체에서 두 가구밖에 되지 않는다. 신대(新垈), 새터는 이름을 암시하듯 새로 생긴 마을이다. 황만근의 부친은 전쟁 중에 죽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때 이미 그를 배고 있었는데 남편을 여의고 황만근을 낳은 까닭에 항렬을 따서 이름을 지어줄 사람이 없어 집에서 우러러보이는 산, 만근산(萬根山)에서 이름을 받았다. 만근산은 신대 1리에서 3리까지가 띠 모양으로 둘러 있는 천곡지(千谷地)를 병풍처럼 에워싸서 물을 가두고 또한 사철 물을 대주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만근산의 천곡이라는 이름의 계곡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고 계곡에서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 모아 한곳에 살게 한 곳이 바로 신대리이다. 이쯤만 해도 황만근이라는 이름이 곧 동네의 뿌리를 상징하는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백번'은 무엇을 이름인가. 황만근이 땅바닥에 넘어진 횟수가 백번임을 말한다. 황만근은 어릴 때부터 유난히 자주 넘어졌는데 동네 사람들 말대로 '', 곧 자주 아는 척하는 윗마을 황학수의 말마따나 평형감각을 관장하는 소뇌가 미발달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동네에서 툭, 소리가 나면 홍시 떨어지는 소리, 아니면 황만근이 넘어지는 소리라고 여겼다. 누군가 황만근에게 도대체 하루에 몇 번 넘어지는지 세어보라고 했다. 기왕 넘어지는 거 셈공부나 하라는 충고였겠다. 저녁때 어린 황만근에게 몇 번 넘어졌는가 물으면 황만근은 손가락을 꼽고 발가락을 꼬고 무릎과 허리까지 배배 꽈가며 용을 썼다. 그런데 황만근은 언제부터인가 그런 물음에 명쾌하게 '백분'이라고 대답했다. 하루에 백번, 한달에 백번, 일년에 백번, 평생 백번. 백은 황만근이 셀 수 있는 가장 큰 단위였다.

'찝원'은 면사무소가 있는 봉대 장터의 국숫가게 주인이 보태준 별명이다. 어느날 열서너살 난 더벅머리 황만근이 국수를 사러 와서는 가게 문간에서 이렇게 말했다. "꾹찌 찝원어찌만 쪼요." 국수장수가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황만근은 신중하게 손가락을 헤아리더니 다시 '꾹찌'라고 하면서 가게 주변이 온통 환하도록 널려 마르고 있는 국숫가닥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찝원'이라고 했는데 주인은 그 말을 그의 손에 들린 십원짜리 지폐를 보고 겨우 알아들었다. 어린시절 황만근은 혀가 짧았던 것이다.

황만근은 나면서부터 물가(전국에서 다섯 번째 깊이라는 천곡 저수지를 인근에서는 이렇게 이른다. 저수지를 자랑하고 싶을 때 담수량이나 넓이라면 모르되 깊이는 따져 무엇 하겠다는 건지, 동네에 처음 들어갔을 무렵 민씨는 알 수가 없었다. 다섯 번째라면, 최소한 전국 다섯 군데 저수지의 깊이를 쟀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 깊이는 갈수기의 깊이인가, 장마철의 깊이인가, 평균의 깊이인가, 측정 당시의 깊이인가, 최대의 깊이인가, 가운데의 깊이인가. 생각할수록 무한한 함수가 생겨나는 이런 기준을 과연 누가 만들었는가. 민씨는 알 수가 없었다. 또한 민씨는 그 불투명한 기준에서 첫째도 아니고 다섯 번째에 불과한 것에 어째서 내세울 만한 게 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여튼 그 저수지에 ''이라는 본질적인 이름을 붙이고 그 저수지 주변에 띠처럼 붙어서 만들어진 동네를 대범하게 '물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신대리에 산다)의 제일 바깥쪽 동네, 곧 신대1리에서도 제일 바깥의 마을 어귀에 살고 있다.

동네를 집으로 비유하면 황만근의 집은 행랑채에 해당한다. 행랑채가 그렇듯 동네의 다른 집에 비해 황만근의 집은 작고 보잘것없다. 6·25 후에 계곡 입구를 막아 저수지를 완공했으니 마을 대부분의 집은 전쟁 직후에 지은 것이다. 황만근은 그때 젖먹이였고 아버지는 죽고 없었다. 이웃들은 저마다 각자의 집을 짓느라 바빠 과부 시어머니와 과부, 그리고 젖을 빠는 유복자에게 집을 지어줄 만한 여유가 없었다. 수숫단으로 벽을 하고 짚멍석으로 바닥을 한 뒤에, 형편이 닿는 대로 나무와 흙으로 조금씩 지어나간 그 집은 계속 덧칠을 한 그럼처럼 엉성했다. 세월이 흘러 집꼴은 갖춰졌을망정 지붕이나 방, , 마당 할 것 없이 집을 이루는 구성요소란 구성요소는 빠짐없이 늘 손이 가야 형체를 유지했다. 비가 오면 새는 곳을 막아야 했고 바람이 불면 지붕이 날아가지 않을까 걱정해야 했다. 눈이 오면 무너질까 걱정, 불을 때면 방바닥에서 올라오는 연기에 눈물을 쏟아야 했다. 집은 온통 때우고 바르고 받쳐놓고 묶어 간신히 붙들어놓은 모양이었으며 어느것 하나라도 모르고 건드리면 일순간 폭삭 쓰러질 것 같았다. 그래도 방이 두 개에 마루 흉내를 낸 널쪽이 앞쪽에 붙어 있는 한일자 형인데 황만근은 집에 있을 때면 늘 그곳에 앉아 있었다. 수십년을 여일하게 집보다 높은 길을 내다보며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밥을 먹을 때면 마루는 상으로 변했고 황만근은 마당으로 내려가 쭈그려앉아 밥을 먹었다. 여름에는 거적때기 같은 이불홑청을 겨울에는 바깥에 비닐을 두르고 마루 아래로 나오는 굴뚝의 온기에 의지해 잠을 잤다. 왜 방을 놔두고 엉덩이 하나 걸치기도 비좁은 마루에, 노상 거적때기 같은 홑청을 깔고 앉아 있느냐 하면, 방에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들은 동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황만근을 '반쪽' 또는 '싸래기'로 취급했고 자신이 있는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싫어했다.

 

"들어올라만 털고 씻고 들어와!"

 

황만근 자신이 방에 들어 가 자는 것에 낯설어했으므로 들어가서 자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이미 수 십 년 동안 밖에서 자는 게 익숙해져 그런지 방에서 자면 옷을 모두 벗어젖히는 버릇이 있었다. 벗어젖힌 몸에서는 무슨 벌레가 기회다 싶어 기어나오는지, 황만근이 자고 간 방에는 살충제를 한통씩 뿌려도 잡히지 않는 벌레가 남는다. 했다. 황만근의 집에 있는 두 개의 방을 하나씩 차지한 사람들은 그의 젊은 어머니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그의 아들이었다. 어느날 황만근에게 지나가던 우체부가 집에 누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황만근은 가슴을 펴고 '두 바리' 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바리'는 가축 같은 짐승이나 곤충의 머릿수를 뜻하는 '마리'의 신대리 사투리다. 우체부는 공연히 그 말을 동네방네에 퍼뜨려 황만근을 다시 한번 바보로 만들었다. 누가 그렇게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우체부가 황만근에게 무슨 악의를 가지고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신문 보는 사람도 없던 시절, 기껏해야 군대간 자식에게서 오는 편지가 뉴스이던 시절,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라도 드라마를 만들어 웃고 싶어했다. 황만근은 가장 그럴듯한 소재였고 배역이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한 실수나 바보짓도 늘 황만근에게 가탁해서 그를 점점 더 바보로 만들어갔다.

황만근을 낳은 그의 어머니는 집안의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 어머니는 어머니인데 젊다. 그리고 아주 곱다. 두 사람이 나란히 있으면, 그런 경우가 인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보기 어렵다. 한 사람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방안에 있고 한 사람은 눈이 노아 바람이 부나 밖에 있으니 말이다. 모자간이 아니라 오누이간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물론 황만근이 오빠로 보인다. 언뜻 봐서는 황만근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다. 늘 입을 벌리고 벙글벙글 웃는 한가지 표정에 굵은 주름이 이마와 뺨을 종횡으로 가로지,고 있어서 마흔은 확실히 넘었지만 그에 30년을 더한다 해도 통할 수 있다. 그의 어머니는 황만근이 철이 든 후에는 한번도 찬물에 손을 담가보지 않고 대감집 마나님처럼 살아서 그런지 동네의 또래 노인들보다 예닐곱은 적어 보인다.

왜 그렇게 나이 차이가 적은가 하면, 황만근의 어머니가 돈을 받고 팔려와서 열댓살인가에 황만근을 낳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신대리도 하루 네 번식 버스가 들어올 정도로 개명했지만, 전쟁이 있기 전에는 시집 장가 가는 일이 아니면 외지 사람을 구경하기도 힘들 정도로 두메였다. 신대리에 나서 살아온 여자들은 때려죽여도, 아니 맞아죽어도 신대리 사람에게는 시집을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신대리 총각들은 이십리쯤 떨어진 낙양군 봉대면 면소재지 저잣거리에 가서 '처녀 구함'이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서 있다가 그에 반한 넋나간 처녀를 잡아채어 신대리로 돌아오든가, 중간에, 사람을 놓아 험난한 시절 딸을 팔아서라도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에게서 처녀를 구해 장가를 갔다. 물론 후자의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를 두고 중매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해서 마을에 들어온 처녀를 '민며느리'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는데, 이름이야 어떻든 그런 경로고 신대리에 들어온 처녀들은 해가 가기 전에 아이를 낳게 마련이었다.

신대리에는 처녀가 시집을 오기가 어렵지 오기만 하면 ''의 깊은 곳에 있는 용왕이 밤마다 찾아와서 틀림없이 아들을 점지해준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신대리의 집집마다 아들이 없는 집이 없었고 그 아들들이 자라면 장가 때문에 아버지 같은 어려움을 겪었다. ''에서 가장 깊은 곳은 저수지가 생기기 전부터 깊이를 알 수 없다는 소()가 있었고 그 속에 용궁으로 통하는 길이 있어 무명실 세 꾸러미를 풀어도 끝이 안 난다고 했다. 물론 용왕은 점지만 해주지 실제로 아들을 갖게 하는 건 신대리 사내다. 만약 용왕이 점지를 넘어 무슨 해괴한 다른 일을 벌였다면, 신대리 사람들이 해마다 대보름에 일 미터가 넘는 얼음을 깨고 색동옷을 입힌 돼지 한 마리씩을 용왕에게 바칠 리가 없을 것이다. 하여튼 황만근의 어머니는 어리고 어린 나이에 팔려오다시피 신대리에 들어왔고 여자로서의 징후가 나타나자마자 신대리가 전사에 기록될 정도로 격전장이 되었다.

황만근의 아버지는 천곡 계곡의 양안을 오가는 포탄과 총알의 불빛과 소리를 구경하러 나갔다가 유탄에 맞아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그때 황만근은 어머니 뱃속에서 여덟 달째 머물러 있던 중이었는데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벌떡 일어서면서 그만 황만근을 아래로 빠뜨리는 바람에 머리가 앞뒤로 긴 '남북 짱구'가 되었고 열달의 십분(十分)에서 두 달이 모자라는 '팔푼'이 되었다고도 한다. 그후로 시어머니, 곧 황만근의 할머니가 황만근과 그의 어린 어미를 함께 키웠다. 황만근이 열다섯살이 되던 해, 할머니마저 세상을 버리자 그때부터 황만근이 어머니를 봉양하게 되었는데, 서른 살이 될까 말까 한 젊은 과부는 그때까지 밥을 어떻게 하는지조차 몰랐고 그후로도 황만근이 있는 한 알 필요가 없었다. 농사를 짓든 비럭질을 하든 쌀을 들고 들어오는 것도 황만근이었고 그 쌀을 씻어 솥에 안치고 불을 피우는 것도 황만근, 상에 밥과 반찬을 차려서 먹으라고 갖다주는 것도 황만근, 물린 상을 들고 가서 설거지를 하는 것도 황만근이었다. 그의 곱고 새파란 어머니는 황만근이 밥과 집에 관련된 일을 하는 동안 시어머니가 물려준 곰방대에 담배를 채워 연기를 코로 뿜으면서 황만근이 하는 짓을 물끄러미 건너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다. 황만근의 나이가 차자 군대 징집영장이 나왔다. 동네는 물론 온 면에서도 알려진 바보라 황만근은 당연히 면제가 되었겠지만, 일단 신체검사와 소집면제에 필요한 절차를 밟기 위해 군청이 있는 읍에는 가야 했다. 황만근은 쌀밥을 한솥 해서 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한 뒤에 참기름으로 맛을 내어 주먹밥을 만들었다. 주먹밥 몇 덩이는 보자기로 싸서 허리에 차고 나머지는 상 위에 얹어 놓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배고프면 이거 먹어라. 내 얼릉 갔다올게."

 

어머니는 쓰다 달다 말도 없이 황만근이 하는 양을 지켜볼 뿐이었다. 신체검사는 황만근의 생각처럼 얼른 끝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황만근은 입가에 침만 좀 흘렸을 뿐, 또래의 친구들처럼 스무살 남짓한 건강하고 잘생긴 청년으로 보였다는데, 징집을 감독하러 온 사람들이 이리 뜯어보고 저리 물어보고 으르고 협박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던 모양이다. 황만근은 결국 샛별이 뜨는 저녁이 되어서야 신체 검사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밤길을 도와 백릿길을 걸어서 어머니가 혼자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던 황만근은 평생을 좌우할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당시에는 군청이 있는 읍에서 신대리까지 오는 버스도 없었고 있다 해도 끊어질 시각이라 산길로 오는 게 빨랐는데 네 개의 봉우리를 돌거나 넘어야 했다. 그중 네 번째 고개의 이름은 토끼고개다. 어지간히 다 왔다 싶었는데, 어째선지 걸어도 걸어도 고갯마루가 나오지 않고 한군데서 맴도는가 싶더니 문득 어둠속에서 털이 눈부시게 하얗고 창날처럼 뻗친 수염과 홍보석처럼 붉은 눈을 가진 토끼가 달려나왔다. 그 날은 그믐 때여서 달빛조차 없었는데 눈부시게 희었다니 그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고 사람들은 말한다. 황만근이 그날의 일을 수백 번도 더 말했지만 처음과 다르게 말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나저나 토끼가 너무 컸다. 토끼의 귀가 황만근의 머리보다 더 높이 솟아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토끼는 입을 움직이며 사람의 말을 했다.

 

"너는 집에 못 간다. 너는 집에 못 간다. 너는 집에 못 간다. 너는 여기서 죽는다."

 

토끼의 입술이 갈라진 사이로 황만근의 엄지손가락만한 날카로운 이가 반짝였다. 무슨 불빛이 있어서 반짝이기까지 했느냐고. 초봄이라 토끼고개에는 눈이 채 녹지 않고 있었다. 하다못해 별빛에라도.

 

"그기 뭔 소리라? 내가 내 집에 내 발로 가는데 니가 뭐라꼬 집에 못 간다 카나. 귀신이마 썩 물러가고 토끼마 착 엎디리라. 내가 너를 타고서라고 집에 갈란다."

 

거대한 토끼는 황만근이 한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비린 냄새를 풍기면서 느릿하고 탁한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너는 여기서 죽는다. 너는 여기서 죽는다. 너는 여기서 죽는다. 너는 집에 못간다."

 

황만근은 온몸에 소름이 돋고 털이란 털은 모두 위로 곤두섰다.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토끼를 밀치며 "비키라!"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토끼를 밀친 황만근의 팔이 토끼의 털에 묻히는가 싶더니 진공청소기에 빨려드는 파리처럼 쑤욱 안으로 빠려들어가는 것이었다(황만근이 한 말이 아니라 그 말을 들은 민씨의 표현이다). 황만근은 한 팔로 옆에 있는 나무를 붙잡으면서 빨려들어간 팔을 도로 빼려고 안간힘을 썼다. 황만근을 빨아들이려는 공간은 아무것도 잡히지 않을 정도로 넓었고 허전했고 또한 소름끼치도록 차가웠다. 토끼는 토끼대로 쉽게 끌려들어오지 않는 황만근을 마저 끌어들이기 위해 온몸을 떨면서 뒷발을 든 채 버티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다. 어느새 동쪽 하늘이 부옇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토끼는 황만근을 향해 "너는 이제 살았다. 너는 이제 살았다. 너는 이제 살았으니 나를 놓아라" 하고 말했다. 황만근은 오기가 나서 "택도 없는 소리 말거라. 니를 탕으로 끓이서 어무이하고 나하고 마주앉아서 먹어치울 끼다. 니 가죽을 빗기서 어무이 목도리를 하고 내 토시를 하고 장갑을 할 끼다. 니는 인자 죽었다, 자슥아" 하고 소리쳤다. 토끼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네 팔을 빼겠느냐." 황만근은 팔을 안 빼는 게 아니라 못 빼고 있는데 토끼가 그렇게 물어오자 할말이 없었다. 그래서 되는 대로 "내 소원을 세 가지 들어주기 전에는 니까잇 거는 못 간다" 하고 말했다.

 

"네 소원이 뭐냐."

 

"우리 어무이가 팥죽 할마이겉이 오래오래 사는 거다."

 

(팥죽 할마이란 팥죽을 파는 할머니, 혹은 늘 팥죽을 쑤고 있는 할머니 같은데 그 할머니가 누구인지, 어째서 오래 산다고 하는지 민씨는 모른다.)

 

토끼는 마을이 있는 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가 몸을 소스라치게 떨고 나서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들어주었다. 그 다음은?"

 

"여우 겉은 마누라가 생기는 거다."

 

"송편을 세 번 먹으면 네 집으로 올 거다. 다음은 무엇이냐?"

 

"떡두깨(떡두꺼비) 겉은 아들이다."

 

"마누라가 들어오면 용왕이 와서 그렇게 해준다. 이제 나를 놓아라."

 

"내가 언제 니를 잡았나. 니가 가뿌리만 되지, 바보자슥아."

 

그러자 토끼는 속았다는 걸 알았는지 얼굴을 무섭게 부풀리더니 황만근의 얼굴에 뜨겁고 매운 김을 내뿜었다. 황만근이 눈을 뜨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간신히 떠보니 어느새 자신의 팔이 돌아와 있는 것이었다. 황만근의 주변에는 토끼털이 무수히 떨어져 바늘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황만근은 제대로 숨쉴 겨를도 없이 집으로 달려갔다. 동네 곳곳의 닭들이 횃대에서 소리쳐 울고 있었다. 황만근은 밖에서 "어무이, 어무이"하고 소리치면서 마당으로 뛰어들어갔지만 방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방안에 들어가보니 그의 어머니는 그가 나갔을 때의 모습 그대로,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해 앉아 있었다.

 

"어무이, 어무이!"

 

그가 어깨를 흔들자 젊은 어머니는 모로 쓰러져버렸다. 그러면서 "카악!" 하고는 목에서 주먹밥 덩어리를 토해냈다. 황만근이 어머니를 껴안고 통곡을 하다가 손발을 주무르고 온몸을 어루만지자 어머니는 눈을 떴다.

 

"니 와 인자 왔노?"

 

"밤새도록 토깨이 귀신하고 씨름을 하다 왔다. 니는 괘않나."

 

"니 기다리다가 아까 해뜰녘에 닭이 울길래 밥 한딩이를 입에 넣었다가 목이 맥히서 죽을 뿐했다. 움직있다가는 더 맥힐 것 같애서 손가락 하나 까딱 모하고 이래 니가 오기 기다리고 있었니라. 이 문디 겉은 놈의 자슥아, 와 밥만 해놓고 물은 안 떠다놨나!"

 

황만근은 울다가 웃다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러고는 어머니에게 엉덩이를 채어 물을 뜨러 동네 우물로 달려갔다. 그날 우물가에서는 황만근의 기이한 체험이 여러 사람의 입으로 하루종일 수십번 되풀이되었고 종내 황만근이 우물가로 초청되어 입이 아프도록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아야 했다.

송편을 세 번 빚을 만큼의 시간, 곧 세 해가 흐른 뒤에 토끼의 말대로 어떤 처녀가 그의 집으로 들어왔을 때 동네 사람들이 황만근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그 처녀는 이웃 군에서 농기계상을 하는 사람의 수양딸이었는데 어떤 연유로 자살을 하러 ''에 들어갔다. 기왕 물에 빠지려면 인적이 없는 곳에 빠지는 게 좋았겠지만, 죽으려는 마음이 급해서 동네 어귀에 들자마자 곧바로 물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동네 어귀, 길 아래 물가에 조그만 집 마루에서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늘 바깥을 내다보는 눈이 있음을 몰랐다. 그 눈의 주인은 처녀의 허리가 물에 들어가는 중에 뒤에서 "짬깜, 짬깐!" 하고 뛰어왔다. 그러고는 혀 짧은 소리로 무슨 말인지를 했는데 처녀는 알아듣지를 못했다. 처녀를 건져낸 황만근은 "빨개동이맨쭈로물에서모욕하마우엄하고미기잡아여" 하는 중얼거림을 수십번은 되풀이했다. 요지인 즉 '어린아이처럼 저수지에서 멱을 감으면 목숨을 버릴지도 모르고 더불어 옷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황만근의 집에 끌려온 처녀는 황만근의 어머니가 내준 옷으로 갈아입고 황만근의 어머니와 함께 뜬 눈으로 밤을 지냈다. 그러고는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황만근의 집에 그대로 머물게 되었다. 어쩌면 그 무렵이 황만근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때였는지도 모른다.

처녀는 농기계상의 딸답게, 아니 황만근으로 하여금 동네 최고로 경운기라는 농기계를 동네에 들여오게 함으로써 농기계상의 딸이라는 말이 돌게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황만근에게 경운기 모는 법을 가르쳤다. 그 덕분에 황만근은 더 이상 길에서 넘어지지 않아도 되었다. 황만근은 일곱 달 동안 경운기 조종법, 간단한 수리, 구조에 대해 배웠고 경운기에 대해선 동네 누구보다도 많이 아는 사람이 되었다. 하긴 그 일곱 달 동안 동네에서 경운기를 가진 사람이 황만근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경운기 덕분에 황만근은 사람 대접을 받기 시작했고 동네 사람이 먼저 옷깃을 잡아당기려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누구의 부탁도 거절하지 않았고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경운기를 몰기 전까지 황만근은 황씨 문중의 종답 세 마지기를 얻어 벼농사를 짓는 외에, 동네 머슴으로 갖가지 궂은일을 다했다. 모내기나 추수 때처럼 품앗이를 할 때는 아이나 여자처럼 장정의 반밖에 안되는 품으로 취급받아 제값을 받으려면 남들의 두 배 되는 시간 동안 일을 해주어야 했다. 그런데 경운기가 들어옴으로써 어엿한 농군으로서, 아니 다른 집에 경운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한 사람 이상의 대접을 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았다.

'처녀가 용왕 사는 쏘() 있는 천곡에 오기가 힘들어 그렇지 일단 오기만 하면 용왕은 최단시간에 백발백중 아들을 점지한다'는 전설대로 일곱 달도 지나지 않아 처녀는 아이를 낳았다. 당연히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동네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처녀가 어떤 연고로 황만근에게 시집을 왔는지 황만근은 물론 처녀나 시어머니 모두 입을 열지 않았고 버린 자식 취급하는 처녀의 친정에서 사람이 찾아올 리도 없는데, 어떻게 된 건지 동네 사람들이 처녀가 집을 나온 전말을 샅샅이 알게 되었던데다 없는 이야기까지 덧붙여져서 황만근이 없는 데서는 얘깃거리가 그것뿐인 듯했다. 이웃군의 번화한 읍에 있는 농기계상의 수양딸이던 처녀는 친척에게 몸을 버렸는데 그 친척은 집안의 삼대독자였으며 자폭적으로 군대에 가서 지뢰매설공사를 하다 지뢰가 터져서 죽었다. 처녀는 나가 죽으라는 온 집안의 저주를 받고 집을 나왔다가 황만근에게 구해져서 함께 살게 되었으며 아기는 죽은 친척의 씨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가 처녀의 귀에 들려서였을까. 처녀는 아이를 낳은 지 삼칠일이 되던 날,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처녀는 여전히 처녀였다. 총각 황만근은 아들을 강보에 싸안고 젖동냥을 하러 신대1리에서 3리까지 매일 돌아다녔다. 그럴 때마다 동네 아이들은 황만근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놀려댔다.

 

"만근아, 만근아, 네 등에 지고 가는게 뭐라?"

 

"아들이다."

 

"누구 아들이라?"

 

"내 아들이라."

 

"토끼가 줬나?"

 

"아이다, 내 해다(내 것이다, 또는 혀 짧은 말로 내가 해서 낳았다로 이중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및근이라?"

 

"여끈(열 근, 혹은 여섯 근)."

 

아이는 몸무게가 열 근이 넘어서도 아버지에게 업히거나 아버지의 경운기에 실려다니며 사람과 소의 젖을 얻어먹었다. 집에 있는 아이의 할머니는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지 몰랐고 알았다 하더라도 손 하나 까딱할 리 없었다. 모든 건 황만근의 책임이었고 일이었다. 그렇게 자란 아이는 어릴 때 젖을 곯아서인지 유난히 식탐이 많았고 고집불통이었다. 친구가 없는 아이는 동네의 어떤 아이보다 많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는데 이 모두 황만근이 손으로 깎고 다듬어 만들어준 것이었다.

황만근의 어머니와 아들, 조손은 입맛이 까다로워 비린 반찬이 없으면 먹지를 않는가 하면 비린 반찬이 있으면 밥상머리에서 돌아앉았다. 한끼에 두 번 상을 차리는 일이 예사였다. 어머니 한 상, 아들 한 상이었고 본인은 상이 없이 먹었다. 황만근은 하루 일이 끝나면 반드시 경운기에 고기를 매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을 하는 동안 논 주변에서 잡은 붕어나 메기, 미꾸라지, 혹은 메뚜기, 방아깨비라도 짚에 꿰어 들어왔다. 동네에서 이따금 잡는 소나 돼지, , , 오리, 토끼같은 가축 모두 숨을 끊는 것에서부터 내장을 손질하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포정( )의 업()에는 황만근이 반드시 필요했다.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오래도록 자주 하다보니 어느새 전문가가 된 것이었다. 그는 그런 일을 해주고 얻어온 고기를 뜨고 굽고 찌고 데치고 삶고 끓이는 데도 이골이 났다. 어쩌다 그가 만든 음식에 숟가락을 대본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감탄을 하게 마련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희한할세, 바보가" 하는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만들어져 있는 조미료를 몰랐지만 재로가 가지고 있는 맛을 흠뻑 우려내어 조화를 지킬 줄 알았다.

황만근은 또한 책에 나오는 예()는 몰라도 염습과 산역(山役)같이 남이 꺼리는 일에는 누구보다 앞장을 섰고 동네 사람들도 서슴없이 그에게 그런 일을 맡겼다. 똥구덩이를 파고 우리를 짓고 벽돌을 찍는 일 또한 황만근이 동네 사람 누구보다 많이 했다. 마을길 풀깎기, 도랑 청소, 공동우물 청소…… 용왕제에 쓸 돼지를 산 채로 묶어서 내다가 싫다고 요동질하는 돼지에게 때때옷을 입히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일에는 그가 최고의 전문가였다. 동네의 일, 남의 일, 궂은일에는 언제가 그가 있었다. 그런 일에 대한 댓가는 없거나(동네 일인 경우), 반값이거나(다른 사람의 농사일을 하는 경우), 제값이면(경운기와 함께하는 경우) 공치사가 따랐다.

 

"반근아, 너는 우리 동네 아이고 어데 인정없는 대처 읍내 같은 데 갔으마 진작에 굶어죽어도 죽었다. 암만 바보라도 고마워할 줄 알아야 사람이다. 아나 어른이나 너한테는 다 고마운 사람인께 상 찡그리지 말고 인사 잘하고 다니라. 아이?"

 

황만근은 황재석씨의 이런 긴 사설을 들을 때조차 벙글거렸다. 일이 끝나면 굽신굽신 인사를 했다. 춤을 추듯이, 흥겹게.

 

그의 집에는 그가 수십년 동안 만져온 연장이 그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순서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 연장들 역시 그의 집이나 어머니나 아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매일 돌보는 덕분에 윤기가 흘렀다. 그는 집에 있는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잘 알고 있어서 대부분의 고장은 스스로 고쳤다. 특히 경운기는 초기에 나온 모델로 지금은 부품도 제대로 없는 고물 중의 고물이었지만 자주 망가지는 수레만 열 번 넘게 갈았을 뿐, 엔진이 달려 있는 앞부분은 계속 고쳐 썼다. 그의 경운기는 구식인데다 하도 고친 데가 많아서 그가 아니면 운전은커녕 시동조차 걸 수 없었다.

다만 황만근은 술을 좋아했는데 가난한 까닭에 자주 취하게 마실 수는 없었다. 어쩌다 동네에 애경사가 있어 술을 공짜로 마실 기회가 생기면 반드시 고꾸라지도록 마셨다. 고꾸라진 그를 떠메어 집에 데려다 뉘어줄 사람이 없었던 까닭에, 동네 사람들이 몰인정하고 야박해서가 아니라 그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태어나서 한번도 제대로 씻지 않은 몸에서 풍기는 야릇하고 기이한 냄새가 남의 옷이나 몸에 배면 솥에 넣고 삶아도 쉽게 가시지 않는다는 평판이 있어서 떠메기를 싫어했다, 마당이나 길섶을 가리지 않고 누워서 잠을 잤다. 겨울에 애경사가 생기면 길에서 얼어죽을지도 몰라 아예 그를 부르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어김없이 그런 자리에 나타나 탄압과 만류를 무릅쓰고 반드시 고꾸라지도록 마셨으며 역시 취해서 마당에 쓰러졌다. 그래서 황만근의 아들은 철이 들면서부터 겨울이 되면 취한 아버지를 부축하고 집에 데려오는 게 일이 되었다. 얼마나 그런 일이 잦아 단련이 되었는지 중학생이 되자 벌써 아버지를 업을 정도였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발로 차며 올 수도 있게 되었다.

민씨는 어느 겨울날 신대 2리의 환갑잔치에 갔다가 얻어마신 낮술에 취해 일찍 집에 돌아왔다. 잠깐 잠이 들었다 깨니 어느새 밤의 어스름이 장년의 머리에 내린 서리처럼 서럽게 내려와 있었다. 느닷없이 찾아든 정한(情恨)에 힘이 빠진 민씨는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그때 벽 하나를 두고 길에 맞닿은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어서 민씨는 무심히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아부지야, 인마, 퍼뜩 일나라."

 

변성기에 들어선 소년의 목소리였다.

 

"쪼매만 더 앉아 있지. 내 니 엄마를 꿈에서 보다 말았다 안카나."

 

그것은 마흔을 넘긴 사내의 어리광 같았다.

 

"너는 우째 맨날 술로 처먹고 내 속을 썩이나. 너 때문에 내가 학교 공부도 못하겠고 인생도 싫고 고마 밥맛이 없다."

 

"아이고, 우리 아들, 아들님, 내 잘못했다. 한분만 봐조라."

 

"니가 자꾸 이렇게 비겁하게 나오기 때문에 동네 아들도 너를 무시하는 거 아이가. 제발 체면 좀 지키라. 시염(수염)만 어른이가. 내가 챙피해 죽겠다."

 

"체면이 뭐가 문제라. 사람이 지 손으로 일하고 지 손으로 농사지어서 지 입에 밥 들어가마 그마이지. 남 쳐다볼 기 뭐 있노. 하이고. 그란데 와 자꾸 눈이 깜기까."

 

"니 자꾸 이카마 할매한테 일라준다. 할매 부르까, ?"

 

"하이고, 제가 고마 크게 잘못했십니다. 아들님요, 일나께요. 제발 어무이만 부르지 마소."

 

그리고 벽에 쿵쿵 하고 머리를 부딪는 소리가 나더니 부자가 이인삼각으로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민씨는 그때 동네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그 부자가 삼강오륜을 모르는 별종인가 아니면 도깨비가 장난을 한 건가 하면서도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뒤 어쩌다 민씨가 소년과 만나게 되었을 때, 민씨는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소년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지만 그저 수줍고 평범한 시골 중학생일 뿐이었다. 하여튼 민씨는 그 일 이후로 그 부자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황만근의 주량은 실로 컸다. 그는 경운기 짐칸에 늘 한말짜리 술통을 끈으로 묶어 싣고 다녔다. 그는 어머니와 아들의 끼니를 지극정성으로 해다 바치는 것처럼 술통에는 늘 술을 채워두었다. 그는 밥을 먹기 전에 지름이 자신의 얼굴만한 양은그릇에 막걸리를 한 양푼 부어 반을 마시고 밥을 먹은 뒤에 나머지를 소리도 맛있게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셨다. 들일을 나가는 날이면 점심으로 라면 하나를 가지고 갔다. 봉지를 뜯기 전에 막걸리 반 양푼, 봉지를 뜯어 물어 붓고 흔든 생라면을 삼키다시피 먹고 나서 다시 반 양품. 저녁때는 식구들이 밥을 먹는 동안 마루에 앉아 한 양푼이었다. 그것이 그의 저녁이었다. 식구들이 밥상을 물리면 설거지를 하고 난 뒤에, 동네 남정네들이 어디서 술판을 벌이는지 마을회관을 비롯, 동네를 돌며 커다란 코와 귀로 주의깊게 살피다가 그런 자리를 발견하면 그의 주량은 고꾸라질 때까지 무량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이면 그는 부엌에서 정성껏 차린 밥상을 어김없이 방으로 들여보내는 것이었고 자신은 마루에 앉아 막걸리 반 양푼 뒤 식사, 그리고 반 양푼의 순서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농가부채 해결을 위한 전국농민 총궐기대회'가 열린다고 이장이 방송을 해서 저녁에 마을회관에 사람들이 모였다. 황만근은 누구보다 먼저 나타났고 이장이 시키는 대로 마을 구판장에서 막걸리를 받아왔다. 스테인리스 물잘이 두어 개밖에 없어서 한 사람이 마시면 다음 사람이 받고 하는 식의 술자리였다. 황만근은 자신의 차례가 되면 번개처럼 잔을 들어 마시고는 눈을 끔벅거리면서 잔이 도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황만근의 관심은 오로지 잔이 언제 돌아올까 하는 것뿐인 듯했다. 그래도 잔이 도는 속도는 너무 느렸다. 민씨에게는 좀 빠른 듯했지만.

 

"그래서 우리 동네서도 군청 앞에서 열리는 대회에 전원 참가를 해야겠다, 이 말이라. 집에 돌아가거들랑 경운기를 깨끗이 손질해가지고 내일 아침에 민소 앞까정 끌고 와서 집합을 하라는 기 행동지침이라. 그래가이고 군청까지 가는 국도로 깅운기로 길기 행진을 하민서 우리의 결의를 행동으로 보이주는 기라."

 

"경운기가 없는 사람은 어쩌나요?"

 

민씨가 물었다.

 

"농사짓는 사람이 깅운기도 없다 하마 농사꾼이 아니지럴. 그랜께 민씨는 농사짓는 기 아이라. 비니루하우스 안에 꽃 및송이 심가놓고 우째 농사를 짓는다 카나."

 

"어디 고장난 경운기는 없어요? 경운기가 꼭 있어야 합니까."

 

무안해진 민씨는 둘러보며 물었다. 새마을지도자인 황철석이 대답했다.

 

"말이 그렇다는 기지, 민소까지는 깅운기를 끌고 가든동 버스를 타고 가든동 하고, 그 담에는 깅운기를 같이 타마 되지, 까잇거. 그란데 민씨는 진짜 농사꾼도 아이민서 왜 자꾸 농민궐기대회에 나갈라꼬 캐싸."

 

"아아, 저도 부채는 남주럽지 않게 있어요."

 

또래인 황학수가 말을 이어받았다.

 

"농사를 지도 부채, 농사를 몰라도 부채. 아이고, 그라마 우리를 다 합치가이고 부채말고 선풍기를 해도 되겠네."

그날 분위기는 그렇게 무겁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시덕거리며 끝낼 정도로 가벼운 것도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 가운데서도 농협에서 융자금 상환을 하지 않는다고 소송을 해서 법원에 불려다니는 사람이 두셋 되었다. 스스로 진 빚도 문제였지만 서로 연대보증을 서는 바람에 한 가구가 파산하면 보증을 선 사람 역시 연쇄적으로 파산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동네 전체가 야반도주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이런 거 한다고 뭐 높은 데 사는 양반들한테 들리기나 하겄나. 질국 다 뺏기고 나앉는 거 아니요."

 

"뺏아봤자 저들한테도 남는 기 없을 낀데. 암만 빌빌하는 닭이라도 닭모가지를 비탈만 인제는 계란 한 개도 없을 낀데. 전부 다 손해라."

 

"전부가 아이지. 가들은 계란도 수입해다 먹으마 된께 우리사 죽어서 죽이 되든가 말든가 가들은 까딱마이지."

 

이장의 통고를 듣고 우울한 농담을 주고받은 뒤 한동안 말없이 술잔을 돌린 다음 자리는 끝났다. 마을회관에서 술잔이 오간 뒤, 항용 있는 노래방 타령도 없었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황만근은 그 와중에서 남의 술잔을 가로채 먹다 여러번 손등을 맞아가며 핀잔을 들었다.

 

마을회관 밖, 어둠속에서 오줌을 누던 민씨는 우연히 이장이 황만근을 붙들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 보게 되었다.

 

"내 이러키까지 말을 해도 소양이 없어. 보나마나 내일, 융자받아서 다방이나 댕기민서 학수겉이 겉농사 짓는 놈들이나 및 올까. 만그이 자네겉이 똑부러지기 농사를 짓는 사람은 하나도 안 올 끼라. 자네가 앞장을 서야 되네. 자네 깅운기 겉은 헌 깅운기에다 농사짓는 놈 다 직이라고 써붙이 달고 가야 된께……"

 

민씨가 헛기침을 하자 이장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황만근이 약간 앞서고 민씨가 뒤를 따르면서 두 사람은 한동안 걷게 되었다. 그날따라 하늘에는 별이 초롱초롱했고 아직 차가운 봄바람이 술로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를 금방 씻어갔다. 민씨는 무슨 말을 꺼낼까 말까 망설였다. 이제까지 늘 여러사람이 있는 데서만 만났지 한번도 황만근과 단둘이서만 제대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는 탓도 있었다. 그런데 황만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참 똘똘하기 잘도 돈다."

 

"뭐가 말씀입니까."

민씨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저 빌()들 말이라. 시계맨쭈로 하루도 쉬지 않고 똑딱똑딱 나왔다가 들어갔다, 나왔다가 들어갔다 하지 않는기요."

황만근에 대해서는 부지런한 술주정뱅이 이상으로는 아는 게 없었던 민씨는 조금 어리둥절했다. 그러다가 그에게 알맞을 것 같은 물음을 찾아냈다.

 

"군청까지는 얼마나 걸릴까요. 경운기로 가면 말입니다."

 

"한나절은 걸릴 끼라."

 

"경운기 운전을 잘하신다면서요."

 

"동네에서는 내가 젤 오래 했응께. 깅운기도 마이 늙었어. 고집이 시가이고 나 아이만 발동도 안 걸리. 내가 제 똥창까지 환하게 안께 말을 듣는 기라."

 

"……내일 궐기대회에 가십니까."

 

"내사 뭐 어머이 밥도 끓이디리야 되고…… 모르겠소. 구장은 나 겉은 상농사꾼이 꼭 가야 된다 카는데."

 

"어머니 연세가 얼마나 되시죠?"

 

"올개가 환갑인데."

 

그제야 민씨는 그를 다시 보았다. 도시의 육십대는 되어 보이는 주름진 얼굴, 싱글벙글하는 표정, 멋대로 뻗친 흰머리, 거칠고 큰 손, 굽은 어깨를, 민씨는 갑자기 재미있어졌다.

 

"혹시 술이 모자라시면 제 집으로 가실랍니까. 집에 먹다 남은 소주가 있는데요. 안주는 없고."

 

황만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엉덩이를 가볍게 돌려대더니 민씨의 집으로 가는 곳에서 꺾어들었다.

 

다음날 새벽, 민씨는 새벽녘에 잠깐 동네 어귀에서 탈탈거리는 경운기 소리를 들었다. , , …… 시동이 잘 걸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타닥, , 타닥, , , , , , , 탈탈탈탈…… 그 뒤에도 궐기대회 가는 집마다 경운기를 끌고 나오려면 온 동네가 시끄럽겠다고 생각했지만 웬일인지 다른 경운기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경운기 소리가 아득히 멀어져가는 소리를 들으며 민씨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전날 밤, 분명 꿈은 아니었다, 민씨는 황만근의 말을 이렇게 들었다.

 

"농사꾼은 빚을 지마 안된다 카이."

 

(한번 빚을 지면 그 빚을 갚으려고 무리하게 일을 벌인다. 동네 곳곳에 텅 빈 우사(牛舍), 마른똥만 뒹구는 축사, 잡초만 수어한 비닐하우스를 보라. 농어민 복지, 소득향상, 생활개선? 다 좋다. 그걸 제 돈으로 해야 한다. 제 돈으로 하지 않으면 그건 노름이나 다를 바 없다. 빚은 만근산의 눈덩이, 처마의 고드름처럼 자꾸 커진다.)

 

"기계화영농 카더이마 집집마다 바퀴 달린 기계가 및이나 되나. 깅운기, 트랙터, 콤바인, 이앙기, 거다 탈곡기, 건조기에…… 다 빚으로 산 기라. 농사지봐야 그 빚 갚느라고 정신없다."

 

(한 집에서 일년에 한 번 쓰는 이양기를 들여놓으면 그게 일년 내내 돌아가던가. 놀 때는 다른 집에 빌려주면 된다. 옛날에는 소를 그렇게 썹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서로 도와가면서 농사짓는 건 옛날 말이다. 한 집에서 기계를 놀리면서도 안 빌려주면 옆집에서 화가 나서라도 산다. 어차피 빚으로 사는데 사기가 어려울까. 기계에 들어가는 기름은 면세유(免稅油). 면세유 가지고 기계를 다 돌리기는 힘들다. 옆집에는 경운기가 두 댄데 면세유는 한 대분밖에 나오지 않는다. 경운기가 왜 두 대씩 필요할까. 한 사람이 한꺼번에 두 대를 모는 것도 아닌데.)

 

"그런 기 다 쌀값에 언차진다(얹어진다). 언차져야 하는데 사실로는 수매하마 먹고살기 간당간당한 돈을 준다. 그 대신에 빚을 준다. 자금을 대준다 카는데 둘 다 안했으마 좋겠다. 둘다 농사꾼을 바보 멍텅구리로 만든다."

 

(따라서 제대로 된 농사꾼이 점점 없어진다.)

 

"지 입에 들어갈 양석(양식), 곡석을 짓는 사람이 그 고마운 곡석, 양석한테 장난치겠나. 저도 남도 해로운 농약 뿌리고 비싸고 나쁜 비료 쳐서 보기만 좋은 열매를 뺏으마 그마이가?"

 

(모두 빚을 갚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그러므로 빚을 제 주머니에서 아들 용돈 주듯이 내주는 사람, 기관은 다 농사꾼을 나쁘게 만든다. 정책자금, 선심자금, 농어촌구조 개석자금, 주택 개량자금, 무슨무슨 자금 해서 빌려줄 때는 인심좋게 빌려주는 척하더니 이제 와서 그 자금이 상환능력도 없는 사람들을 파산지경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제 와서 그 빚을 못 갚겠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내가 왜 빚을 안 졌니야고. 아무도 나한테 빚 준다고 안캐. 바보라고 아무도 보증 서라는 이야기도 안했다. 나는 내 짓고 싶은 대로 농사지민서 안 망하고 백년을 살 끼라."

 

일주일 뒤에 황만근은 돌아왔다. 그의 아들이 그를 안고 돌아왔다. 한 항아리밖에 안되는 그의 벼를 담고 돌아왔다. 경운기도 돌아왔다. 수레는 떼어내고 머리 부분만 트럭에 실려 돌아왔다. 황만근 아니면 그 누구도 작동시킬 수 없는 그 머리가, 바보처럼 주인을 태우지 않고 돌아왔다.

 

황만근, 황선생은 어리석게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해가 가며 차츰 신지(神智)가 돌아왔다. 하늘이 착한 사람을 따뜻이 덮어주고 땅이 은혜롭게 부리를 대어 알껍질을 까주었다. 그리하여 후년에는 그 누구보다 지혜로웠다. 그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듯 그 지혜로 어떤 수고로운 가르침도 함부로 남기지 않았다. 스스로 땅의 자손을 자처하여 늘 부지런하고 근면하였다. 사람들이 빚만 남는 농사에 공연히 뼈를 상한다고 하였으나 개의치 아니하였다. 사람 사이에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나 함께하였고 공에는 자신보다 남을 내세워 뒷사람을 놀라게 했다. 하늘이 내린 효자로서 평생 어머니 봉양을 극진히 했다. 아들에게는 따뜻하고 이해심 많은 아버지였고 훈육을 할 때는 알아듣기 쉽게 하여 마음으로 감복시켰다.

선생은 천성이 술을 좋아하였는데 사람들은 선생이 가난한 것은 술 때문이라고 했다. 선생은 어느 농사꾼보다 부지런했고 농사일에도 익어 있었다. 문중 땅과 나이가 들어 농사가 힘에 부친 사람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농사를 짓되 땅에서 억지로 빼앗지 않고 남으면 술을 빚어 가벼운 기운은 하늘에 바치고 무거운 기운은 땅에 돌려주었다. 그러므로 선생은 술로써 망한 것이 아니라 술의 물감으로 인생을 그려나간 것이다. 선생이 마시는 막걸리는 밤이면서 사직(社稷)의 신에게 바치는 헌주였다. 힘의 근원이고 낙천(樂天)의 뼈였다.

 

전일에, 선생은 경운기를 끌고 면소재지로 갔지만 경운기를 타고 온 사람이 없어 같이 갈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선생은 다시 경운기를 끌고 백릿길을 달려 약속장소인 군청까지 갔다. 가는 동안 선생은 여러번 차에 부딪힐 뻔했다. 마른 봄바람에 섞인 먼지가 눈을 괴롭혔다. 날은 흐렸고 추웠다. 이윽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경운기에는 비를 피할 만한 덮개가 없어서 선생은 뼛속까지 젖어드는 추위에 몸을 떨었다. 선생이 군청 앞까지 갔을 때 이미 대회는 끝나고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에게 가져다줄 생선을 사고 몸을 녹인 선생은 날이 어두워오는 줄도 모르고 경운기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경운기에는 빠르게 달리는 차량의 주의를 끌 만한 표지가 없어서 선생은 몇 번이나 사고를 당할 뻔했다. 그때마다 멈추었다가 다시 출발하는 바람에 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어두워지면서 경운기는 길 옆의 논으로 떨어졌고 수레는 부서졌다. 결국 선생은 그 밤 안으로 집에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선생은 경운기에 실려 있는 땅의 젖에 취하여 경운기 옆에 앉아 경운기를 지켰다. 그러나 경운기는 선생을 지켜주지 않았다. 추위와 졸음으로부터 선생을 지켜주지 못했다. 아아, 선생이 좀더 살았더라면 난세의 혹염에 그늘의 덕을 널리 베푸는 큰 나무가 되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알아 주지 아니하고 감탄하지 않는 삶이었지만 선생은 깊고 그윽한 경지를 이루었다. 보라. 남의 비웃음을 받으며 살면서도 비루하지 아니하고 홀로 할 바를 이루어 초지를 일관하니 이 어찌 하늘이 낸 사람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이 어찌 하늘이 내고 땅이 일으켜세운 사람이 아니랴.

 

단기 사천삼백삼십년 오월 스무날

 

본디 묘지에나 쓰일 것[墓碑銘]이지만 천지를 대영혼의 집으로 삼은 선생인지라 아무 쓸모도 없는 이 글을, 새터말로 귀농하였다가 이룬 것 없이 다시 도시로 흘러가며, 남해인(南海人) 민순정(閔順晶)이 엎디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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